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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란슬롯×마토 카리야 커플링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 신령이 나오는 오컬트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작중 등장하는 묘사 혹은 서술이 불쾌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언젠가부터 매일 밤 그 녀석이 보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짙은 색의 긴 머리카락을 날개뼈를 살짝 넘는 정도로 드리우고 있었으며, 어둠 속에서만 나타났기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음침한 인상이었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어두운색이었으며 항상 검은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으니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키는 아마도 나를 훌쩍 넘는 장신일 것이다. 그런데도 체구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고, 근육은 분명 있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꽤 말랐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 말한다면 마른 근육이라고 부를 것이다. 게다가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잘생겨 뭇 여성들이 본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미형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녀석을 두려워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녀석이 인간이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
     또다. 이름 모를 그 유령 녀석은 오늘도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기 나름대로 나를 배려하고 있는 건지, 내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나타나서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이렇게 지켜보다가 동이 트면 사라지곤 했지만. 차라리 그럴 바에야 나에게 해코지라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다른 악령들처럼 악몽을 꾸게라도 하든가. 아니면 가위에라도 눌리게 하든가. 그렇게라도 한다면 아예 제령을 받을 텐데, 이 녀석은 그저 조용히 나타나 나를 지켜보고 홀연히 떠날 뿐이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내가 자려고 할 때마다 찾아오는 걸까. 영감이 조금 있는 것이 다고,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짓을 한 적도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그 녀석이 안 보이는 척 등을 반대로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카리야.”
     침대에 가만히 걸터앉아 있던 유령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는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조금 움츠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음침한 인상을 한 남자는 눈을 감고 있는 내 뺨에 손가락을 뻗으며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조용히 숨을 삼켰다. 공포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길쭉하지만 굵은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에 닿더니, 푸석하게 흐트러져 있는 머리를 천천히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소중한 무언가를 다루는 듯 아주 느릿하고 진득한 손길이었다.
     “카리야.”
     그는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사람의 것과는 다른 차가운 체온이 내 피부를 통해 전해져왔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이것’은 인간이 아닌 무언가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알려주고 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온도였다.
     결국 나는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다음 날, 마토 카리야는 초췌한 몰골로 출근을 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반차를 써버렸다. 카리야 본인은 정상적으로 퇴근하고 싶었지만, 그 상태로 계속 일을 했다면 아마도 동료 직원들이 그를 뜯어말렸을 정도로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방법뿐이겠지.”
     카리야는 토오사카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 중 가장 깔끔한 방법이었던 것이 그 이유다. 마토 카리야, 그러니까 마토 가문인 카리야라면 사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본가로 돌아가 해결해도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마토와 연을 끊고 독립해버린 카리야로서는 그럴 수는 없었다. 물론 본가로 돌아가게 된다면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카리야가 돌아가면 극진한 대접을 하며 반겨줄 것이다.
     그런 것이 불편했다. 토오사카 가문과 마찬가지로 이곳 후유키 시의 신사를 관리하며 각종 종교적인 제례 및 제령을 담당하고 있는 마토 가문은 겉으로는 아주 유명했으나, 그 실상은 음험한 수단을 써 사람들의 재물을 뜯어내고 괴롭히는 악질적인 가문이었다. 적어도 카리야가 알고 있는 한은 그러했다. 아마 카리야가 마토로 돌아가 제령을 받게 된다면 또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하지만 신관이라는 것이 그저 구실뿐인 직책은 아닌 건지, 마토에 태어나는 인간들은 대대로 영감이 조금이라도 있곤 했다. 카리야는 마토의 재능을 그다지 많이 물려받지 않아 보통 인간들보다 약간 더 영감이 있는 편이었지만, 카리야의 형이자 마토의 차기 계승자인 마토 뱌쿠야, 그리고 현 마토 가의 당주인 마토 조켄은 그야말로 영감의 정수였다.
     그랬기 때문에 카리야에게 그 수상한 남자가 보였던 걸지도 몰랐다. 영감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귀신 같은 건 들러붙어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예전부터 이 쓸모없는 자질 때문에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종종 보곤 했던 카리야였기에, 이런 일에 말려 들고 나서부터 더더욱 자신의 핏줄을 원망하며 홀로 한탄을 했다.
     “망할.”
     카리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마토 가문과는 반대로, 카리야가 알고 있는 한 토오사카 가문은 청렴한 신관 가문이었으나, 되레 그것이 문제였다.
     현 당주인 토오사카 토키오미는 한때 카리야의 연적이었다. 학창시절, 토키오미와 카리야는 둘 다 젠조 아오이를 사랑했다. 이 때문에 아오이가 없는 자리에서는 서로 신경전을 벌이거나 사사건건 경쟁하는 등 소소한 다툼이 있었지만, 아오이의 진정한 행복을 바란 카리야는 깊게 관여하지 않고 한 발짝 물러나 토키오미에게 그녀를 양보했다. 결국 아오이는 토키오미와 결혼하여 토오사카 아오이가 되었고, 현 토오사카 가문의 후계자인 린과 사쿠라를 낳아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카리야가 깔끔하게 포기했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지금도 가끔 시간이 나면 아오이와 그녀의 자식들을 만나러 토오사카 저택에 방문하곤 하는 카리야였지만 아직 토오사카 토키오미와 얼굴을 마주하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기에, 카리야는 한숨을 반복해서 푹푹 내쉬며 힘없이 길을 걸었다.
     머지 않아 카리야는 직장에서 꽤 가까운 편인 토오사카 저택에 쉽게 도착했다.
     “토키오미, 나야.”
     카리야는 초인종을 누른 후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곧 아이들이 뛰어오는 듯한 가볍고 명랑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장녀인 린이 웃는 얼굴로 현관문을 활짝 열며 카리야를 반겨주었다.
     “카리야 아저씨! 오랜만이……. 꺄, 꺄아아악! 어, 어머니!”
     하지만 린은 카리야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며, 비명과 함께 아오이를 찾아 저택 안으로 부리나케 달려 들어갔다. 곧 훌쩍이는 소리와 어수선한 목소리들이 들려오더니, 아오이가 린을 불안하게 만든 카리야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현관 쪽으로 다가왔다.
     “카리야 군……? 이, 이럴 수가…….”
     카리야를 마주한 아오이의 얼굴 또한 금세 창백해졌다. 경악을 금치 못하며 왼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려버린 아오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카리야에게 물었다.
     “너, 대체 무슨 령을 붙이고 다니는 거니.”

────────

     토키오미와 아오이는 카리야를 응접실로 불러들였다. 아이들에게는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건지, 린과 사쿠라는 잠시 안쪽에 있는 방으로 보낸 듯했다. 어른만이 남은 조용한 공간 속에서 엄숙한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카리야는 긴장이 감도는 응접실에서 소파에 얌전히 앉아 시종들이 타 온 차를 아무 말 없이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카리야. 그 령은 위험하다.”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은 토키오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위험, 하다니.”
     카리야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깃을 주무르며 가만히 토키오미의 설명을 들었다. 토키오미의 말에 의하면, 아무래도 그 령은 보통 령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이 변하여 된 령은 살아있는 인간의 원념이 그대로 영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생령이나 한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지박령 등의 잡령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제령 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카리야에게 붙은 령은 본래 인간이었던 것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였던 것 같았다.
     “다시 말해서, 신령이라는 거다.”
     “신…….”
     “카리야. 아마도 너는……. 그래, 용띠였지. 과연.”
     토키오미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카리야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주변에 머무르고 있는 신령이라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은 심각한 것을 보는 듯 아주 진중했기 때문이었다.
     “이무기다.”
     “이무기?”
     “그래. 다른 말로는 미즈치(蛟). 간간이 오로치(大蛇)라고 불리기도 하지.”
     이무기라면 용이 되지 못한 뱀을 뜻하는 것이라고, 마토를 나서기 전 얼핏 들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카리야가 용띠였기 때문에, 용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그를 질투하여 힘을 빼앗기 위해 카리야에게 들러붙은 이무기 신령일 것이라고 토키오미는 이어서 설명했다. 용띠라면 다른 사람도 많았겠지만, 마토는 대대로 물의 기운을 띠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무기가 찾아오는 것을 가속했던 걸지도 몰랐다.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서는 깊은 물 속에서 오랜 세월을 버텨야 하기 때문이었다.
     용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원한에 사무친 것이겠지. 토키오미는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들어간 후, 무언가를 들고나왔다.
     “일단 제령은 해보겠다.”
     그가 들고나온 보석함 속에는 붉은색의 영롱한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손가락에 낀 후 토키오미가 어려운 한문으로 이루어진 주문을 외자, 보석이 은은하게 빛났다. 타오르는 듯한 보석의 색과는 반대로, 카리야는 잠깐 얼어붙는 듯한 추위를 느껴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토키오미의 제령이 끝나자마자 한기는 사라지고 편안함만이 남았다.
     이런 상쾌한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마음고생, 몸 고생을 했는데 이렇게 어이없게 끝나버리다니. 조금 허탈하다는 기분도 들어 카리야는 어안이 벙벙한 채 토키오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이걸로 된 거야?”
     토키오미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제 불쾌한 오한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덤으로 말하자면, 카리야. 네 연애운이 좋지 못했던 것도 그 신령 때문이다.”
     “너한테 듣고 싶지는 않은데.”
     카리야는 툴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오이를 가로챈 토키오미에게만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카리야가 짝사랑했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카리야를 돌아봐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제령을 받았으니 나도 평범한 연애가 하게 될 수 있는 걸까. 집으로 가던 도중, 카리야는 몰래 그런 생각을 했다. 보통 령도 아닌 신령 같은 존재를 상대로 제대로 제령이 되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마음은 편안해진 건지 그런 장난스러운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덧붙여서, 이왕 연애가 잘 풀리게 되었다면 다음에 자신과 사랑을 하게 될 사람은 토오사카 아오이처럼 긴 머리를 아름답게 내려뜨린 청초한 인상의 여성이었으면 좋겠다는 흑심도 품으면서 말이다.

────────

     그러나 그날 밤, 제령을 받았던 것이 무색하게 카리야는 다시 이무기 신령과 만났다.
     “…….”
     그 녀석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긴 남보라색의 머리를 날개뼈까지 드리운 음침한 인상의 남자는 소름 끼칠 정도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카리야를 바라보기만 했다. 카리야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저 눈을 감고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눈꺼풀 너머로 스산한 공기가 느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신령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 되었다.
     “카리야.”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동시에 몸이 차게 식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싸늘한 체온을 가진 신령의 손이 카리야의 뺨에 닿아 피부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사람의 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한 온도였다. 하지만 단순한 영혼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뚜렷한 온도였다.
     무심코 눈을 떴다. 그리고 신령과 눈이 마주쳤다. 심연을 담은 보랏빛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눈빛으로부터 적대감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소름이 돋을 만큼 진득하고, 깊고, 다정하면서도 경이로운 무언가.
     “설마, 제가 용이 되지 못하여 당신에게 붙어 있다고 착각하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길고 굵은 신령의 손이 카리야의 귓불 부근을 훑었다. 곧, 차갑고 말캉한 것이 근처에 닿아 카리야는 몸을 움츠러뜨렸다.
     냉기를 품고 있는 그의 입술이었다.
     “그럴 리가. 저를 그런 족속들과 같은 취급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카리야.”
     그가 말을 걸기 전까지만 해도 미세하게 떨리던 몸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는 입술에서는 가쁜 숨 이외에는 그 어떤 말도 뱉을 수 없었다.
     그제야 카리야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몸에 바싹 붙어 이곳저곳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는 이 신령은 아마도 인간, 특히 자신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유형의 신적인 존재라는 것, 그리고.
     “저는 그저 당신에게 반했을 뿐이니까요.”
     칠흑처럼 어두운 그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연심이라는 것을.
     마토 카리야는 결국 그날 밤, 시체처럼 차디찬 신령의 품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

     “과연. …생각했던 것보다 골치 아프군.”
     카리야는 다시 토키오미의 집을 찾아왔다. 며칠 전 그의 집을 오랜만에 방문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수척해지고 초췌해진 몰골이었다. 안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쩍 마르고 허약해 보이는 인상이었기에 더더욱 걱정스러워 보여, 심각한 표정으로 상담을 하는 토키오미와 카리야에게 차를 대접해온 아오이의 얼굴 역시 불안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네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해코지를 하지는 않겠지만.”
     토키오미는 아오이가 가져온 홍차를 한 모금 머금은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대로라면 너는 고독사하게 될 테니까.”
     “시끄러워.”
     명백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리야는 토키오미의 옆에 앉아 함께 홍차를 마시고 있는 아오이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연애운. 그런 게 없더라도, 자신에게는 젠조 아오이만 있으면 족했다. 비록 경쟁에서 물러나 토키오미에게 그녀를 양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잠깐 기다려라.”
     그렇게 말하며 토키오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실 구석에 놓여 있는 고풍스러운 3단 서랍 쪽으로 다가갔다. 첫 번째 단에서 보석으로 세공된 아름다운 은빛 열쇠를 꺼내더니, 두 번째 단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양피지 위에 붉은색의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부적?”
     “그래. 아마 일시적인 수단이겠지만.”
     카리야는 토키오미에게 부적을 건네받았다. 절연한 상태였지만, 나름 오컬트 쪽에서는 유명한 마토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카리야는 부적에 새겨져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검을 형상화한 것 같기도 했고, 용의 비늘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정말 이런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일까. 카리야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부적을 들고 토키오미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막아주는 부적이다. 단, 좋은 것도 모조리 막아버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좋아.”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카리야는 결연한 표정으로 부적을 속주머니에 넣었다. 모든 것을 막아주는 부적.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그는 너무나도 절박했다. 매일 밤 이렇게 그 음산한 남자가 자신의 침대맡에서 어슬렁거린다면 불면증이 도져 언젠가 직장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적을 챙기자 이상하게도 편안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건 정말로 편안한 걸까? 오히려 온몸을 표백제 속에 담근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었지만, 어찌 됐건 지금 자신의 주변에서 그 신령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해결된 것이었다.
     “…….”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면 뭣 하러 그렇게 마음고생을 했던가. 지금까지 잠을 설쳤던 나날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자, 카리야는 그간의 고통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정말로 이름도 모르는 그 이상한 신령과는 안녕이었다.
     “정말 끝인 거야.”
     다시는 볼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그러면서도 마음속 어딘가에는 찝찝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기분 탓일 거라고 애써 둘러대었다.
     ─저는 그저 당신에게 반했을 뿐이니까요.
     이제는 보이지 않을 신령의 낮은 목소리가 여전히 메아리처럼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듯했다. 하지만 카리야는 모든 미련을 가까스로 떨쳐내며 토키오미가 건네준 부적을 챙긴 후 그저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

     모든 것이 끝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신령이 사라진 이후, 카리야는 더 극심한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차라리 단순한 악몽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카리야가 새로 겪기 시작한 것은 꿈이 아니라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이었다. 매일 밤, 해가 깊게 저물고 어둠이 찾아오면 주택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끼익 거리는 것 같은 잡음이 들려왔다. 귀를 막거나 일부러 큰 소리를 내어도 그 소음은 분명하게 들려왔다. 그러다 카리야가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면 환청이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그를 비웃는 듯한 끔찍한 목소리로 변했다. 동시에, 마치 뱀이 온몸을 휘감고 꽉 조이는 듯, 차갑고 끈적이는 느낌이 전신을 장악했으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하루도 끊이지 않고 그것들은 카리야를 괴롭게 했다. 혹여 눈이라도 마주치면 정말로 목숨을 빼앗길 것만 같아 카리야는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결코 눈을 뜨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악령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카리야에게 호감이라도 가진 신령과는 반대로, 명백하게 카리야에 대한 악의를 품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나면, 카리야는 피폐한 모습이 되었다. 몸은 점점 야위었고, 직장에서도 집중하지 못해 지적을 받기 일쑤였다. 영적인 존재 때문이었기에 무어라 핑계를 대고 조퇴하기도 어려웠다.
     ‘젠, 장.’
     그렇게 생각하며 카리야는 눈을 꽉 감고 침대에 누워 혀를 찼다. 그날도 카리야는 두려움에 떨며 그저 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잊지도 않고 그를 찾아온 수많은 악령이 카리야를 둘러싸고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마토 카리야. 마토. 카리야. 마토. 마토. 마토. 마토. 크크크크큭.
     뱀처럼 비늘을 두른 듯한 악령이 미끄러운 혀로 카리야의 귓바퀴를 핥으며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겁도 없어. 재능은 있어도, 힘이 없지.
     곤충처럼 딱딱하고 섬모가 돋아 있는 피부를 가진 악령이 카리야의 흉부를 힘주어 눌러 숨을 쉬지 못하도록 하며 입을 열었다.
     ─그 주제에 가문의 비호를 받지 않고. 흐흐흐. 맛있다, 마토. 맛있어, 마토 카리야.
     얼음장처럼 차가운 체온의 악령이 카리야의 두 다리 위에 올라타서는 날카롭고 긴 손톱으로 카리야의 피부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종아리 부근의 피부가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지나가라. 지나가. 제발…….’
     카리야는 해가 뜨고 악령들이 제풀에 지쳐 물러나기만을 바라며 눈을 질끈 감고 간절히 염원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그들이 카리야를 놓아주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은 더 집요하게 카리야를 붙들고 괴롭혔다.
     차라리 그 녀석이 있었다면.
     무심코 그렇게 생각해버린 카리야는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눈앞에는 열댓 명도 더 되어 보이는 악령들이 저마다 순서를 기다리듯 늘어서서 충혈된 듯한 붉은 눈동자로 카리야만을 응시하고 있었고, 자신의 몸에는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을 한 악령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시, 싫……. 싫어……!”
     그 기괴한 광경을 본 카리야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문고리를 잡고 돌려도,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자기 전에 방문을 잠근 적은 없었을 텐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열리기는커녕, 주먹으로 아무리 내리쳐도 유리는 절대 깨지지 않았다. 마치 방탄유리라도 된 듯했다.
     결국 카리야는 궁지에 몰렸다. 굳게 잠겨 있는 창문에 기대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악령들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카리야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부적.”
     절체절명의 순간, 카리야는 토키오미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막아주는 부적. 단, 좋은 것까지 모두 막아준다는 것이 단점이라고 했었지. 그 이무기 신령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저 악령들에게 계속 시달릴 바에야 그 녀석을 다시 부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탁이야…….”
     나를 도와줘. 카리야는 그렇게 말하며 있는 힘껏 부적을 찢었다. 그리고, 검은색의 넓은 망토와 보라색의 긴 머리카락이 카리야의 시야에 나타났다.
     “기다렸습니다, 카리야.”
     처음 그 녀석을 목격했을 때와는 명백히 다른 인상이었다. 항상 입곤 하던 검은색 정장이 아닌 남색의 갑주와 고급진 소재로 된 망토를 두른 이무기 신령은, 부적의 봉인이 풀리자마자 오들오들 떨고 있던 카리야를 자신의 품에 안아 든 후 수많은 악령을 거대한 검으로 단번에 베어버렸다.
     그렇게 카리야를 괴롭혀오던 존재들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 산화했다.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카리야의 이마 위에 신령은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맞댄 후,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이제 그러지 마세요, 카리야.”
     “…….”
     이불을 덮어준 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겨우 악령들을 퇴치해 안정을 되찾은 카리야는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고, 뭐라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금세 잠이 몰려와 눈을 감았다. 의식이 멀어져가는 와중에도 카리야는 어째서인지 좋은 기분이라는 생각만을 했다. 신령에 대한 공포심, 불안함.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이제는 카리야의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수호령. 특정 계기를 통해 한 인간에게 붙어 그 인간을 지켜주는 영적인 존재. 말로만 들었지만 실제로 자신에게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 아마도 저 이무기 신령은 자신의 수호령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음침한 인상이어서 오해했지만, 그의 말대로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있던 것이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전에, 카리야는 깊은 잠에 빠졌다.

────────

     그날 이후로 카리야는 이무기 신령에게 마음을 열었다.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물론이고, 실체화를 할 수 있을 때면 이것저것 잡일을 시키기도 했다. 물론 설거지 같은 것을 시키면 싫증을 내기도 했지만 말이다.
계속 카리야를 고생시켰던 그 신령의 이름은 란슬롯이었다. 이무기 신령인 것치고 서양 쪽의 영혼이라니,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울림이 좋으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란슬롯에게 직접 물어본 바로는, 바다를 타고 잠시 일본에 넘어왔을 뿐이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돌탑을 쌓아준 것을 계기로 완전히 정착했다고 한다. 아마도 돌탑을 쌓은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영혼이라는 것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집이 세고,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 것 같다고 카리야는 생각했다.
     “란슬롯.”
     “네. 카리야.”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는 서재를 정리하던 도중, 카리야는 잠시 쉴 겸 의자에 걸터앉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곧, 자신을 불러줬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환한 미소를 지은 신령이 카리야의 곁으로 다가왔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때와는 달리 인상이 깔끔해졌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저 모습으로 자신을 만나러 왔다면 나도 그렇게 경계하지는 않았을 텐데. 카리야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민망함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검지로 조용히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너, 내 연애운을 막고 있다고 하던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란슬롯을 잘생겼다고 생각하며 홀린 듯 바라보았던 것이 떠올라, 카리야는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평범한 현대인 남성처럼 말끔한 평상복을 입은 채 책장에 책과 서류들을 끼워 넣고 있던 란슬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제가 신령인 탓이겠지요.”
     란슬롯은 자신의 추측을 대충 말한 후 다시 카리야를 보며 미소지었다. 산발을 길게 늘어뜨렸던 과거의 모습과는 반대로,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란슬롯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미형인 얼굴이 훤히 드러나 그야말로 이무기 신령이 아닌, 사람의 정기를 빼앗으며 살아가는 몽마와도 같은 매혹적인 외형을 하고 있었다.
     “…….”
     “카리야?”
     잘생겼다. 아마도 저 녀석이 신령이 아니라 몽마였다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기를 뺏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카리야는, 다시 정신을 차린 후 현실을 외면하듯 고개를 좌우로 마구 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책을 정리하던 것을 멈추고 카리야의 모습을 보며 고민하던 란슬롯이 우물쭈물하며 옷깃을 꼬깃거리고 있는 카리야를 갑작스럽게 뒤에서 끌어안았다. 동시에, 란슬롯의 체취가 가까이에서 풍겨 와 카리야는 이유 모를 두근거림을 느꼈다.
     “라, 란슬롯!”
     “카리야는 그런 건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귀 끝까지 붉게 물든 카리야는 애써 란슬롯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신령에게서 도망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신의 심장이 콩닥거리는 소리가 머리끝까지 닿아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심장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이 녀석은 분명 사람이 아닐 텐데. 그보다 왜 나 같은 걸 끌어안고 심장이 이렇게 두근거리는 걸까. 어쩌면 이 녀석은 정말로 나를. 아닐 거야. 그런 잡다한 생각들이 마구 뒤엉켜 카리야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즈음, 란슬롯은 카리야가 자신을 바라보도록 몸을 돌려 시선이 맞닿게 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를 사랑하시면 됩니다.”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란슬롯은 자신의 입술을 카리야의 입술과 겹쳤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카리야의 혀와 얽혔다.
     창밖으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침 해가 떠올라 창틈 사이로 희미한 새벽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도 보였다. 동시에, 신령인 란슬롯은 무언가를 중얼거리듯 카리야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서는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사라졌다.
     ─다시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동은 텄으나, 마음속을 간질이는 이질적이고 낯선 연심만은 카리야의 마음속에 남아 아침 내내 가슴을 뛰게 할 것이었다.

────────

     소년은 망가진 돌탑 앞에 서서 그것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유명한 신사에 놀러 왔다가 길을 잃은 참이었다. 주변은 메마른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 서 있었고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자갈밭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얇은 밑창으로 된 신발 너머로 울퉁불퉁함이 전해져 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발목 근처에는 생채기가 드문드문 생겼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면, 보수되지 않아 낡은 토리이(鳥居)들의 새빨간 색조가 어두운 가을 하늘에 녹아들어 피처럼 검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마침 날씨도 쌀쌀해질 참이라, 그야말로 옛날이야기 속에 나올 법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그 비좁은 길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자, 거대한 바위 위에 돌 조각들이 으스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옆에는 수명이 다한 듯 기울어져 있는 짙은 회색의 오동나무가 외롭게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그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별들 위로 한 무리의 기러기 떼가 요란한 날개 소리를 내며 가을의 보금자리를 찾아오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초승달은 이제 밤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듯했다.
     “아프지 마.”
     흐트러진 돌덩이들을 위로하듯 쓰다듬고 있던 소년은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다시 쌓아 올려 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크고 정교하지는 않았던 돌탑이었기에, 어린 소년의 손으로도 쉽게 고칠 수 있었다. 돌탑을 다 쌓은 소년은 잠깐 뿌듯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저 멀리서 어른들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서는 돌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있어!”
     소년은 곧 그 자리를 떠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해가 완전히 저물고 깊은 밤이 찾아왔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런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누군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언젠가 그 소년과 다시 만날 수 있을 날만을 그리며, 이무기는 다시 한번 날이 저물 때까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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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외의 이미지는 픽시브 프리 소재를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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